9월 27일 (토)
설마 물 값을...?
아침식사를 마치고 모두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가 냉장고에 넣어 둔 물을 마신 방마다 물 값을 계산하러 올라왔다. 음료수나 맥주 등은 당연히 계산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물 값까지 받다니... 여태까지 없던 일이라 여기저기서 물 값을 치르느라 야단법석이다. 아직 뚜껑을 개봉하지 않은 물 한 병은 반납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는 참 넉넉한 인심을 가진 나라다. 물, 음료수, 커피는 그냥 마셔도 되는데.....왠지 찜찜한 기분으로 양쯔강(양자강-揚子江) 난징(남경-南京) 창지앙 대교(남경 장경 대교)로 향했다. 이 긴 강을 건너서 양주 방면으로 90km 더 가면 양귀비(楊貴妃)의 고향이라고 한다. 아직도 세기의 미인이라 불리는 양귀비. 인간이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은 때로는 야수의 세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 친아들의 아내를 겁탈하는 전제군주의 부도덕이 엮어낸 중국 최대의 로맨스(?)에는 친자식도 커다란 장애물이었던 것일까? 멀어지는 이정표를 바라보며 세기적인 두 연인, 그 비운의 로맨스를 머리 속에 그려보며 「남경 장경 대교」를 건넌다. 6.7km에 달하는 난징 창지앙 대교는 도로와 철도 두 가지 용도로 쓰이고 있는데 다리는 2단식 구조로 되어 있어서 위의 길은 4.5km로 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고, 아래에는 6.7km 길이의 기찻길이 있었다. 22개의 이중으로 된 둥근 아치모양의 입구를 볼 수 있었는데 다리 양쪽의 두 개의 탑은 그 높이가 무려 70m나 된다고 한다. 밤에 켜지는 1900개의 조명이 절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볼 수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자동차가 엄청 밀렸다. 한참 후에 알고 보니 앞에서 화물차와 아직 번호판도 붙이지 않은 새차(승용차)가 접촉사고가 나 있었다. 그들은 122 공안 교경이 와서 처리해줄 때까지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이 유명한 양쯔강에서도 해마다 자살하는 사람이 3~4명이나 된다고 한다. 끝없이 넓은 강물은 모두 뿌연 흙탕물이다. 마치 황색의 넓은 바다를 보는 기분이랄까? 양쯔강을 돌아오던 길로 다시 와서 배수로 공사가 한창인 난징 시내 플라타너스 거리를 천천히 달렸다. 지금은 복잡하고 분주한 “가구센터거리”라고 하는 이 길가에는 가구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렇게 가게가 많아도 모두들 장사가 잘 된다고 한다. 『남경대 도살기념관』입구에 들어서자 멀리에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300,000’이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잘려진 팔, 그리고 머리 형상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넓은 광장의 시체 발굴현장에는 그곳에서 수없이 많이 사람들이 죽었다는 의미로 수많은 자갈이 깔려 있었다. 전시관으로 가는 도중에는 사형장으로 끌려가 죽는 모습들을 벽에 양각화 시켜놓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진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 노란 국화 세 송이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삼광 작전’ 이라 불렸던 모조리 죽이고, 빼앗고, 불살라 버리는 것만이 중국사람 해탈시키는 것이라는 일본군인들. 1시간 정해놓고 106명, 107명씩 죽였다는 그 중 2명의 사진이 보인다. 그들은 일본에서 영웅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우렁이, 대못, 비녀, 그 당시 동전, 총탄, 겹겹이 쌓인 유골들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십대들이 갖는 천성 중 좋은 부분을 억압하고 그들을 살인 병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지... 전후역사가 어찌 되었던 간에 이 사건은 인간존재의 신성함에 도전한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도 매년 12월13일이면 양쯔강에서 뱃고동 소리로 1분 동안 사이렌을 울려 그 날을 되새긴다고 한다.
처음엔 핍박에 의해서 강제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캐나다 국적을 가진 미국인 Mr. John rabe. 그는 중국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때문에 스스로 사진을 찍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난징 대학살은 사망자 수 뿐 아니라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의 참혹함 때문에라도 기억되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총검술 연습 대상으로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군인들의 목베기 시합의 대상으로 희생되었다. 또한 2만~8만에 이르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 일본 군인들은 이 여성들을 강간했을 뿐 아니라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내거나 가슴을 도려내고, 산채로 벽에 못을 박기도 했다.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아들은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받았다. 산채로 매장하기, 거세하기, 신체 장기를 도려내기, 산채로 불태우기 등이 다반사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혀에 쇠갈고리를 걸어 사람을 매달아 놓거나 허리까지 사람을 파묻은 후 독일 산 셰퍼드들의 먹이로 삼는 일 등의 악마적인 행위가 버젓이 저질러졌다. 나치조차도 이 도시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역겨워한 나머지 이 난징 대학살을 ‘야수의 행위’라고 이름 붙일 정도였다.』
- “난징 대학살” 中에서 -
지금도 “일본 놈”이라고 할 만하다. 여기 남경에선... 남경 사람들은...
이곳에서 알아낸 사실들 때문에 나는 놀라고 우울해져서 무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 전 족을 해방시킨 인물 -중국건국의 아버지- 쑨원(손문-孫文)의 묘 중산릉(中山陵)으로 향한다. 자금산(紫金山) 해발 466m 기슭에 자리잡은 그의 묘는 쑨원이 생전에 “내가 여기서 자리 하나 쓰고 싶다” 라는 희망을 근거로 하여 1929년 6월 1일에 그의 유해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400계단이라는 말에 놀라 올라가는 것을 그만 둘까 하다가 잘 정돈된 화단에 붉게 핀 샐비어 꽃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힘든 줄 모르고 긴 돌계단을 올랐다. “BJ 2008”이라고 붉은 꽃으로 올림픽을 상징하는 화단을 잘 가꾸어 놓았다. 청조의 제정을 타도하고 중국 근대혁명의 막을 올린 쑨원. 그의 좌상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함백 옥으로 빚어 모형을 만들어 놓은 모습은 실물크기라는데도 참 작았다. 증산릉은 전체적으로 중국의 전통양식에 새로운 서양식 요소를 가미하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혁명가 쑨원의 일생을 생각해 본다. 계단을 내려와 아기자기한 기념품 파는 가게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의 다양한 기념품들이 밖에까지 진열되어 있는데 무척이나 화려하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는데 음식점이라고 하기엔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한번에 5천명까지 수용 할 수 있다는 항양 어항. 규모가 큰 탓일까? ‘정통중화요리’라는 음식 맛도 근사했다. 가이드의 말이 아니라도 난징에서 제일 가는 음식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 대한여행사 이승철 사장이 가방에서 그 동안 아껴둔 것 같은 일회용 커피를 꺼내주어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여 마셨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한 잔. 이 때 쯤이면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할 것을 오랜 경험으로 그는 잘 알고 있으리라. 국내에선 그렇게 흔한 일회용 커피도 이곳에 오니 정말 귀하기만 하다. 오전 내 무거운 기분이었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기분전환이 되었는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넓은 식당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한꺼번에 수 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하면 5~6명이 식사할 수 있는 작은 방도 보였다. 저녁시간이면 이 대규모 식당도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고 한다. 중국사람들, 먹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때문이리라.
이번에는 버스로 고속도로를 달려 상하이로 이동할 차례다. 오늘은 토요일, 고속도로에서 정체가 될지 어떨지는 그때 봐야 알 일이라고 하는데 약 5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어둑어둑해 질 무렵에야 다시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번엔 순수한 한식이 우리를 기다린다. 알고 보니 우리가 전시회장에서 뷔페로 식사를 할 때 다른 일행들이 한식집에서 청국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한우리(韓宇里)라는 식당 앞에는 대여섯 명의 젊은 남녀가 각자 어깨에 멘 바구니에 굵고 탐스러운 포도를 가득 담아 팔고 있었다. “맛있어요. 만 원!” 한 발짝 옮기면 “팔 천 원!” 또 한 발자국 옮기면 “육 천 원!” 그들은 끈질기게 식당입구까지 쫓아왔다. 아무리 맛있고 싸면 뭘 하나? 계속 이동하는 여행객들에겐 짐만 될 것이 뻔한 것을...
캄캄한 밤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서커스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거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2년 전 북경에서 서커스를 볼 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 때는 묘기를 보면서 그들이 왠지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마치 예술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예전처럼 깡마른 체구가 아니었다. 적당히 단련된 탄탄한 몸에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 보였고 그들이 입은 의상도 색상이나 디자인이 훨씬 멋있게 보였다. 그들이 보여주는 묘기 또한 무척이나 세련되어 있었다. 오늘 본 서커스는 2년 전 북경에서 본 그것과는 달랐다. 차원 높은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첫날 묵었던 「上海中土 大厦酒店」에서 보낸다.
9월28일 (일)
나흘이 참 빨리도 지났다. 이번에는 아이들과도 한 번 밖에 전화통화를 하지 못했다. 참 무심한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나 고3 엄마 맞아?’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침 일찍 서둘렀다. 6시30분에 Check out 해야하기 때문이다. 집에 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우리를 푸동 공항에서는 ‘컴퓨터 장애’ 라는 이유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1시쯤 도착할거야”라는 얘기만 믿고 눈이 빠지게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기는 중국이니까...!’ 어느새 우리 일행들 사이에 유행어가 되어버린 말이 생각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난다. 겨우 탑승수속을 하게 되었다. 아차! 남편이 맥가이버 칼을 여행가방에 넣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인데... “내가 서울 가서 똑같은 걸로 하나 사드릴게요.” 여러 일행들의 위로에도 결국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편은 - 나름대로 오래 정이든 물건이라서 - 결국 현지 가이드에게 맡기고 나중에 여행사로 보내 달라고 한 뒤에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탑승 수속을 하고 비행기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은커녕 조그만 기념품 하나 준비하지 못했다. 공항 면세점에서 느긋하게 기념품을 고를만한 시간이 없었다. “엄마! 초콜렛 사오세요.”하던 아이의 말이 생각나 귀여운 팬더 곰 모양의 초콜렛 등을 열 상자 사고 카드로 결재를 했다. 남편은 송종국 협회 사무국장과 같이 이번 여행경비에서 남은 돈으로 중국 차(tea)를 사서 일행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준다며 물건을 고르느라 마누라는 안중에도 없다.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 거짓말처럼 10분도 채 되지 않아 비행기가 이륙했다. 예정대로라면 집에 도착해야 할 시간인 오후 1시경에야 비로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외국의 다른 어떤 공항보다 인천공항에서의 수속은 빠르고 매끄러웠다. 4박 5일 동안 함께 했던 일행들과 모두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남편의 휴대폰 로밍 업(roaming-up) 서비스를 해지하고 두 시간 후에야 집에 도착했다. “딩동, 딩동” 자전거가 있는 것을 보니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두 번씩이나 벨을 눌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라면 냄새가 코를 찌른다. 4박 5일 동안의 엄마의 부재가 이토록 아이들을 지치게 만든 것일까? 각자의 방에서 깊이 잠든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들녀석의 코 고는 소리가, 딸아이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나를 안심시킨다. “애들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이렇게 잘 있어줘서...” 곤히 잠든 딸아이를 보자 ‘장자지에’ 에서의 구월이가 생각났다. 고3 수험생인 우리 딸과 같은 나이인 구월이.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가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깨면 말해주리라. 구월이 이야기며 발 안마를 해주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공부하는 것이 스트레스인 아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오늘 저녁 우리 집 식탁엔 하얀 쌀밥에 된장찌개, 김치, 고추장이 오를 것이다.
어쩌면 2~3일 동안 내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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