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4일(수)
오후 3시, 상하이 외국 사람들 자본 끌어들여 살이 포동포동 쪘다는.... 그래서 포동 이라는(믿거나 말거나) 푸동(浦東) 공항을 출발했다. 이곳에서 맑은 날 좀처럼 볼 수 없다는데 오늘 날씨는 너무나 맑았다.
여름철에 예쁜 마누라 보다 에어컨이 더 필요하고, 불과 한달 전 까지만 해도 42℃ 까지 올라가는 더운 날씨였으며, 저녁 7시쯤 뉴스에서 내일 날씨보고 38℃ 이상이면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겨울철에도 영하3℃ 밖에 안되며, 땅값이 금값이라는 상하이의 물가는 우리의 서울과 비슷하다는 현지 가이드 조선족 교포 3세 이춘학 (26세) 의 설명을 들으며 버스는 달렸다.
상하이 여행은 도시 속에서 여행의 맛을 느껴야 한다고 누군가 는 말했었다. 그래서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상하이에서 지내는 동안은 우리의 시간 관념도 많이 달라져야 할 것 같다. 그들이 말하는 `곧바로‘ 는 우리가 생각하는 30 ~40 분 정도, `금방’ 은 세시간 “중국 사람들 대개 가 교통질서 지켜 안줍니다.”
가이드의 그 말 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감 나기 시작했다.
오후 5 시 우리 일행이 방문한 상하이 인근의 스크린 인쇄업체 에서는 테이블에 생수와 바나나를 준비해놓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물, 특히 생수가 귀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150명이나 된다는 꽤 규모가 큰 공장 생산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자 화공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우리 고향 왔네, 고향 왔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똑같이 엷은 그린 색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 이 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용기 인쇄를 주로 하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급약 상자)
도 보였다.3층에 무인 건조실이 있었지만 평면 기계는 자동이 없어 전부 수 작업으로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내년 7월 9일 서울 코엑스 전시장에 와서 많이 배워 와야겠다 는 장용(張勇) 사장과의 약속을 끝으로 기념촬영 을하고 공장을 떠났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공장을 떠나는 시간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앳띤 여직원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서민아파트 에는 밖에 빨래가 널려있었는데 그 광경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우리 일행중 한사람 “개방 제대로 했네, 속옷까지 몽땅 다 개방했어” 습도가 높아 겨울철에는 일주일 정도 말려야 한다고 하니 아파트마다 빨래 말리기 전쟁이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점심식사를 간단한 기내식으로 한 탓일까?
저녁식사는 중국식 샤브 샤브 가 준비되어있는 식당에서 푸짐하게 먹었다.
둥근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동안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은 종업원들이 친절하게도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도와주었다.
와이탄(外灘)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넓고 광활한 황푸지앙(黃浦江) 이 있어 야경이 조성된 이곳은 형식이 다른 석조 건물들이 즐비한데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들은 영국식, 프랑스식, 스페인 식, 그리스 식, 르네상스 식 등을 모두 갖추고 있어 마치 한 세기 의 건축예술을 살펴보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야경을 보기 위해 유람선을 타고 약1시간 가량 남포대교 와 노포 대교를 돌아오는 동안 그 아름다움은 여행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가히 백 만 불 야경이라는 찬사가 나올법하다. 앞자리에 80세 된 캐나다인 부부가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봐서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아주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으며 좋아했다.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 모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간외교 사절입니다‘.
여행사 출발안내자료 맨 첫 장 에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던 내용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금 나 한사람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지.......부끄러운 여행자가 되어선 안되겠다는 각오, 다짐해본다. 호텔까지 30분 정도 첫날일정 바쁘게 보내고 (上海中土大厦酒店) 에 도착했다. Room 1104호 가이드가 방마다 다니며 내일아침 식권 나눠주고 꼭 뜨거운 물 마시라며 당부를 하고 간다.
9월 25일 (목)
AM 6:30 Wake up call 소리가 요란하다. 어젯밤 나눠 받은 쿠폰을 가지고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중국 호텔 식당에는 죽이 있어서 참 좋다. 아침 일찍 식사하기 부담스러운 (늦게 먹던 습관 때문에) 나에게 죽 한 공기 와 쥬스 한잔 그리고 파인애플 몇 조각과 빵 , 커피까지 마시니 금새 배가 불러왔다.
오늘부터는 싫어도 아침마다 같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같은 음식을 먹고 돌아갈 때까지 같이 움직여야만 하는 사람들, 그래서 더 정겨운 일행들 8:20 버스에 모두탑승 첫날부터 모두들 시간을 잘 지켰다. 출근길의 복잡한 버스, 멋쟁이 아가씨부터, 잠옷 입은 아저씨, 아줌마들의 자전거 행렬, 걸어가면서 무엇인가를 먹는 모습을 이동하는 차안에서 보는 일은 꽤나 재미있었다. 아파트베란다 밖으로 빨래를 너는 모습도 보인다.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 대부분이 화장기 없는 모습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세수를 하고 나왔는지? 의심이 갈 정도의 모습을 한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띈다.
9시 상해국제 전람센터(上海國際展覽中心)에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한번도 만나지 못하다가도 전시장에 나가면 매번 만나는 사람들 “럭키인화유한공사” 와 “일성 MEM” 이번에도 즉석에서 인쇄한 티셔츠를 어김없이 선물로 주셨다. 지금도 그것들을 입을 때면 그때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 만 같다.
「UNIRICH」 남편의 거래처에서는 점심식사를 뷔페로 준비해 놓고있었다. 다른 일행들이 청국장으로 점심식사를 하러간 사이 남편과 몇몇 분들은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싱가포르인 부부 그들의 친절에, 상술에, 모두들 감탄한 따름이었다. 짧은 영어로 그들과 대화하며 나중에 한국에 나오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부산 강서구 송정동」 에 산다는 독일인 「파울 프라이그」와의 만남도 즐거웠다. 모두들 의견을 모아 3시 20분 전시장을 출발했다
「TIAN HOU SILK COMPANY」를 방문했다. 6명의 예쁜 모델들이 번갈아 가며 실크제품의 의상을 입고 패션쇼를 하는 것을 관람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라는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뽕잎을 먹고 토해내서 누에고치를 만드는 모습이 바구니에 전시되어 있었고 누에의 성장과정이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져 있었다. 실을 뽑는 과정을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니 더운 김 과 함께 번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 과정, 번데기 빼내고 실을 말리는 과정, 여자 4명 이서 잡아당겨 늘리는 과정, 등을 눈으로 직접보고 속옷에서, 스카프, 블라우스 등 다양한 실크제품을 구경했다. (천후 실크회사 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800원 이상 소비하시면 기념품 받을 수 있습니다)볼에 홍조 띤 모습으로 아내의 속옷을 살까?... 망설이는 일행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곳에서 1시간쯤 머문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중국에서 잘못 된 것 중 의 하나가 비행기가 제 시간에 뜨고 내리는 것” 이라는 가이드의 말이 왠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며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향료를 모두 빼고 만들었다는 중국 정통요리 로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항으로 이동했다. 어쩌면 인천서 상해까지 오는 시간보다 상해에서 장자지에 (張家界) 까지 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먼 거리였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기 때문일까?
공항 이곳저곳 에는 한국어로 표기된 안내문이 있었다. 캄캄한 밤길을 달려 도착한 ‘민남 국제호텔’ 늦은 시간인데도 우리말고도 다른 단체 관광객들로 붐볐다.
9월 26일 (금)
짧은 하룻밤이었다.
장자지에 의 비경을 보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7시 호텔출발 그곳 가이드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유난히 큰 눈의 고광오 그리고 오늘하루 우리일행의 비디오 촬영을 한다는 그녀를 우리는 구월이라 부르기로 했다 구월이면 어떻고 시월이면 어떤가 그녀와의 인연도 오늘 하루뿐인 것을....
토가족, 관광지가 되기 전 산 속에서 구차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그네들, 결혼하기전 신부가 친정어머니, 언니, 친척 등과 10일~15일 동안 사설하면서 울어야 한다는 얘기며 그들만의 언어 없어 남녀 사랑 나눌 때 남자가 여자 발을 세 번 밟아 사랑을 고백했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며 무릉원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에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곳이 평소 우리가 무릉도원이라고 말하던 그곳이란 말인가? 가슴이 벅찼다. 3,103개의 봉우리를 다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거의 원시 상태그대로 있는 아열대 숲, 다채로운 풍경, 아름답고 웅장한 경치에 입이 다물어 지질 않았다. 하늘 길로 원가계 로 이동하는 버스 안 에서 (상심 태평양)이란 노래를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아서인지 구운 옥수수도, 밤도, 모두 「췐웬」 우리 돈 「천 원」 을 말한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 할머니, 중년의 아저씨들 모두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췐웬」 을 외칠 뿐이다. 밤 천 원 어치를 달라고 하니 푸짐하게 덤까지 준다.
얼마나 걸었을까?.... 갈증이 났다. 김해 허씨, 밀양 박씨 커피, 꿀 차 집이 있었다. 고향은, 「경상남도 창원군」 이라고 커다랗게 써놓은 곳에서 커피 한잔씩을 마셨다.
한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커피믹스 1잔에 천 원 씩 얼마나 순박한 상술인가, 김해 허씨, 밀양 박씨 아니어도 어찌 그곳을 그냥 지나 칠 수 있단 말인가.
「천하일교 연심 열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새겨서 자물통을 매달고 그 열쇠를 계곡아래에 던지면 두 사람 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전설 때문이리라, 수많은 자물통이 겹겹이 채워져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노fp일을 타고 십리화랑을 왕복하며 바라본 약초 캐는 노인 의 모습을 한 바위를 보고 마치 노인이 약초 망태 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정말 재미있었다.
다음은 보봉호 다. 자연과 인공호수가 잘 조화된 호수 위를 유람선을 타고 천천히 달린다. 얼마나 갔을까 호수 위에 떠있는 허름한 배에서 그들의 고유의상을 입은 토가족 처녀가 나와 맑은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다. 호수를 한바퀴 돌아 반대편 쪽으로 돌아 나올 즈음 이번에는 토가족 총각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노래? 하면 우리가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임원빈 회장님의 처녀 뱃사공 과 이범학 사장님의
소양강 처녀 가 호수 위에서 유람선을 타고 달리는 지금 이 분위기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아니 그런데.... 남자들은 처녀? 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보봉호 를 한바퀴 돌아 나오며 컴퓨터 CD 3장과 장자지에 사진이 담긴 책 한 권 을 우리 돈 6,000원에 샀다. 사진첩은 중국어와 한국어, 일본어 , 영어로 간략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다시 버스로 이동 이번에는 절세 의 기관 이 라 불리는 황룡동 을 볼 차례다. 황룡동 은 모두 4층으로 면적은 약 20헥타르, 수직고도는 100여 미터로서 동굴 속에는 하나의 창고, 2갈래강물, 3개 폭포, 4개 못. 13개 홀, 46개 랑하 가 있고 무수한 석순, 석주, 돌 장막, 석화, 돌 폭포가 있는데 종유석 가운데는 ‘정해신침` 이 있는데 높이가 19.2 미터 직경이 10센티인 투명한 침이 천장까지 닿아 있다고 하는데 이 ‘정해신침`을 위하여 1998년 인민폐 1억 원의 보험에 들었다고 한다. 동굴 안에서 배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야만 종유석의 웅장함을 만끽 할 수 있는 신비로움, 우리 나라의 동굴과는 달리 민 소매 차림인데도 공기가 후덥지근하기까지 한 것이 정말 신기했다. 잠깐! 여러분은 어떤 문으로 들어가셨나요? 동굴로 들어가기 전 「행복의 문」 과 「장수의 문」 이 있었다. 두 갈래 길에서 잠깐 동안 이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난 행복의 문을 택했다. 건강, 장수도 좋지만 행복하지 않은 삶은 아무런 소용없을 테니까, 오늘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도 후들거리고 발바닥도 화끈거렸다. 발 안마?....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냄새나는 발을 어떻게?....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버스는 어느새 「보봉호 관광 복무센터」에 도착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한쪽벽면만 남기고 디귿 자로 의자가 놓여있고 그 앞에는 작은 의자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우리일행 26명이 모두 동그랗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20세 안팎의 남, 여가 우르르 뜨거운 약물이 반정도 담긴 대야를 들고 들어와 발 밑에 놓고 나갔다. 모두들 양말을 벗고 그물에 발을 담그라고 했다. 나도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가 보았다. 너무나 뜨거웠다
몇몇 일행이 너무 뜨겁다고 하자 찬물을 가져다가 조금씩 더 부어 주었다. 난 꾹 참고 발을 잠깐 담갔다. 꺼내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앞에서는 몇 가지 약의 효능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물이 어느 정도 식어 발을 계속 담그고 있어도 좋을 정도가 되어 발의 피로가 조금 풀리는 듯 할 때쯤 발 안마를 배우는 학원 생 인 듯 한 젊은 남녀가 다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여자는 나 한사람 뿐 이었는데 그중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청년이 얼른 내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남자일행들 앞에는 여자들이 앉았는데 여자들의 숫자가 미치지 못해 남편을 포함한 몇몇 일행은 남자들의 안마를 받아야 했다. 김희선. 안재욱. 장동건을 좋아한다는 23세의 청년과 한시간이 넘게 대화한 내용이라고는
“여기 아파?” “아니” “아 아파” “아파?” “응” “여기는 아 퍼 요?” “아니”
무릎아래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남자의 손길이 닿은 적이 또 있었던가?....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그들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획일적인 행동은 나를 아무렇지 않게, 아니, 당연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누군가 다음에 중국여행을 할 기회가 있어 발 안마를 받게 된다면 당당하게 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여행객들을 상대로 많은 매상을 올리는 것 역시 그들의 상술에 달려있으므로.... 발 안마를 받아서 일까? “한국사람 김희선 이뻐, 아주마 이뻐” 청년의 말 한마디 때문일까?.... 하루종일 쌓였던 피로가 모두 풀리고 몸이 날 듯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구월이 가 다시 왔다. 하루종일 촬영한 비디오 테잎과 사진을 코팅해 가지고 왔다. 5x7 규격의 사진(코팅 한 것)이 1장에 3,000원이라고 한다. 어둑한 차 안 에서 낮에 찍은 사진을 보고 자기 얼굴이 나온 사진을 찾아 챙기고 돈을 지불하고.... 바쁘게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공항으로 이동 난징 (南京)행 비행기 에 몸을 실었다. 하루의 일정치고는 너무나 빠듯한 하루였다. 그럼에도 우리일행 모두 신속하게 잘 움직여 주었다.
난 징 공항에 도착 신세기 호텔 에 도착하니 새벽 2시 가 다되어간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내일아침 Wake up call 을 조금 늦게 (8시) 하기로 약속하고 어느새 단잠에 푹 빠져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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