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독백)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가 마시고 싶어 가스렌지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커피 잔을 꺼내고 의식 치르듯 정성스럽게 설탕1, 커피2, 프림2 스픈 을 넣고 식탁에 앉아 습관처럼 창밖을 올려다본다.
앙상한 겨울 풍경이 유난히도 눈이 시린 아침, 차가움 가운데 따스함 이 숨어있는 12월의 햇살, 오랜 습관이 되어 반복되는 이 시간, 차 한 잔을 끓이는 여유로움. 뜨거운 김이 화~악 코끝으로 달려드는 커피 물을 잔에 부으며 문득 내 자신이 오늘 날 까지 마신 커피가 몇 잔이나 될까? 실없는 의문이 생긴다. 누가 말했던가?
커피는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사랑처럼 달콤한 것이라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윽한 커피 향 사이로 이미 등 뒤로 보내어진 여러 가지 모습의 조각들이 조용히 떠오른다.
때로 시리도록 아팠던 순간들, 한 없이 정지하기만을 원 했었던 그때 그 바람들, 새 하얗게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던 순수의 시간들, 그리움, 나와 같이 했었던 잊을 수 없는 얼굴 들. 한 번 지나가 버린 시간이 나에게 다시 주어질 수 없듯이 결코 그 때를 나누지 못 하는 그들, 그리움에 복 받치고 해후의 순간을 기다리게 하는 보고 싶은 얼굴들.
차라리 회상을 나누고 싶은 이 시간, 결국 사람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인가?
기뻐서, 너무 행복해서, 시계만 멈추어 놓으면 시간이 한 없이 멈추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 이 모두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내 유년의 아름다웠던 동화는 어느새 끝나고 나는 슬픈 성년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작은 행복과 멀고 먼 인생의 자취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시작하던 날의 약속, 숨도 수;l지 않고, 옆도 보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온 난ㄹ들, 영원한 사랑의 모양은 어떤 생김새일까?
과일처럼?, 꽃처럼? 아니면 마음 속 영혼의 모양일까?
끝없이 반문하며 지내왔던 날 들, 연륜 의 물결 속으로 흩어져 버린 숱한 체념들, 발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결혼을 알리던 시절이 나에게 있었던가?
서로의 어린시절 마저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던 그런 마음이 과연 나에게 있었던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는 어느 여 가수의 노랫말처럼...
섬광 같은 운명으로 시작된 사랑의 마음이 일평생 이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서글픈 순리일까? 나의 사랑도 긴~긴 겨울잠에 빠져든 것일까?
찬 물에 손 넣기도 망설여지는 날 아침, 이 작은 몸 치 떨게 하는 것이 겨울 추위나 서릿발 때문은 아니리라.
서로 숨 막힐 듯이 구속해서 자아까지 소멸시켜버리는...
다시 그리워 질 수 있을 정도의 자유와 창의성을 허용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꿈꾸어 오던 날 들, 세월의 무상함은 때론 사람의 마음을 옹졸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아주고 체념할 것은 흔쾌히 체념하게 하는 것인가?
단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장이 못내 아쉬워지는 오늘, 겨울은 정녕 고통스럽고 지루한 계절이기만 할까?
놀라운 새 생명을 잉태한 고즈넉한 잠이 어쩌면 이 겨울의 적막인지도 모른다.
잎 진자리마다, 꽃 진자리마다 봉긋이 맺혀 지금은 엎드려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 들이 얼마나 작은 곳에서 시작하는 지...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인 것을...
훌쩍 지나버린 한 해의 끝자락에서 또 나는 부끄러워진다.
토끼해라는 99년 기묘년 새해에는 귀가커서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인품을 가진 영물이라는 토끼를 닮아야지.
길짐승의 평화론 자 라는 토끼의 작고 몽톡한 꼬리의 못남도 닮아야지.
그렇게 작지만 소박하게 모래알 같은 시간의 부스러기 하나라도 아껴서 토끼처럼 지혜롭게
열심히 살아야지! 작은 토끼처럼.
1999년 2월 ‘월간 문예사임당’ 에 게제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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