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룡 박사님께
박사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며칠째 영하의 날씨를 기록하며, 한강이 얼어붙고 곳곳에서 수도관이 동파되더니
우리 집에서도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어제 낮에는 세탁기 연결 호스가 얼어서 뜨거운 물과 드라이어로 녹여 겨우 세탁기를 돌렸는데,
또 오늘 낮에는 ꡐ외출‘로 돌려놓은 보일러의 룸컨트롤이 멍청해서 저녁부터는 난방 작동이
안 되는 거예요.
보일러에서 방안으로 연결되는 파이프가 잠깐 사이에 그만 얼어버렸던 것이지요.
남편이 몇 시간에 걸쳐 거실에서 보일러실로 왔다갔다 분주히 들락거리더니 드디어
밤 10시경부터서야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답니다.
하마터면 이 강추위에 꼼짝없이 찜질방 신세를 질 뻔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벌벌 떨리는 아찔한 밤이었습니다.
이운룡 박사님!
오늘 저녁, 박사님 댁 보일러는 아무 이상 없겠지요? 세탁기도요?
조금 전에 이메일을 열고 보내주신 기축년 연하 글을 읽었습니다. 새해 대망의 축원을
보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읊조려 봅니다.
己丑希!
牛四足玄同(소의 네 발이 하염없이 하나이다.)
己丑年에도 날마다 좋은 날 누리시고 하시는 일마다 如意하셔서
삶이 밝고 찬란하면서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己丑年 元旦 李雲龍 拜
올해에도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걸요.
'좋은 시를 쓰려면 시에 대한 안목을 넓혀야 한다.' 시며 가끔씩 보내주시는 박사님의
시 평설과 '2009 신춘문예 당선작' 등이 제겐 커다란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A-4용지에 출력해서 틈이 날 때마다 읽으며 시인이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지를 박사님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우치곤 한답니다.
지난 해 12월, 일본의 교토(京都) 동지사 대학에서 있었던 '정지용 시비 건립 3주년 학술 세미나'
를 통해 처음 뵈었을 때의 첫인상이 아주 오래 남습니다.
고희를 넘기신 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맑고 순수한 커다란 눈동자, 일본 오사카시
번화가'도톤 보리' 에서 야한 속옷 차림의 마네킹 옆에 서시라며 사진을 찍어 드린다고 했을 때,
천진스럽게 웃으시며 포즈를 취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도쿄로, 오사카로 3일간의 행사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바쁜 연말 연시를 보낼 즈음
보내주신 박사님의 열한 번째 시집 『산새의 집에는 창이 없다』를 받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시집 한 권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박사님께서 매일 새벽 산행을 하신다는 것과 장손의 이름이 '한결(韓玦)'이라는 사실까지도
시집을 통해서 다 알게 되었습니다.
박사님의 시 「짝사랑 말실수」를 읽으며 순진했던 중학교 어린 시절, 사랑과 두려움 속에 열병을
앓았을 사춘기 소년의 모습을 아련히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박사님의 일상이 진솔하게 표백된, 그리고 모든 사람과 자연에 대해 고마워하시는 긍정적인 시세계, 그런 따스한 노래를 저도 부를 수 있을까요?
보내주신 시집을 아껴가며 공부하는 마음으로 몇 번이든 차분히 또 읽으려 합니다.
박사님의 시집에서 제가 좋아하는 「기다림」이란 시를 여기에 옮겨 볼까요.
기다림
시 : 이 운 룡
기다림이란 나와 당신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의 틈새에 있다
가까이, 좀더 가까이를 홰치며
만나기 위해 기다림의 너트를 조인다
시간을 늦추거나
이미 다른 길로 마음을 휘었다면
십 년 백 년을 기다렸다 해도 기다린 것이 아니다
목마른 시간만 허공으로 날렸을 뿐
기다림이란 참는 아픔이다
아픔이 없는 화살은 순간을 못 참아
긴 시간을 뚫고 날아간다.
가서 뉘 가슴 한 복판을 뚫는다, 하지만
부활의 시간은 영원을 참는다
당신을 기다린다, 영원의 후일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목숨을 소화해야 할까
주검이 눈동자를 파낸다, 해도
나의 기다림은 썩지 않을 빛일지니
당신을 기다린다
영원 그 후일까지.
―이운룡 시 <산새의 집에는 창이 없다> 전문
박사님의 시 「기다림」을 읽고 나서 반성되는 게 있었어요. 우리가 컴퓨터나 이메일에서 너무나
흔하게 써버리는 ‘사랑’ 또는 ‘기다림’이라는 말이 해일처럼 범람해 사랑이 어디론가
휩쓸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아니,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기다림'이란 단어를 제 가슴 속에 꼭 붙들어
매놓고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8년은 박사님을 뵙게 된 인연이 제겐 또 다른 행운이었습니다.
전주에서 20년째 지속하고 있다는 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에서 연초 2개월 반 동안 전국 신문사
공모 신춘문예 당선 시를 해마다 교재로 공부한다지요? 1월 첫 주부터'2009 신춘문예 당선작'
공부에 들어갔다니 수강생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다면 꼭 달려가 박사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합니다.
전주라는 곳이 오늘은 참 멀게만 느껴지네요.
기축 새해에도 늘 청년 같은 마음으로 열정적인 모습 보여주시고, 부디 건승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소띠해 1월 13일, 동두천 샛골길에서 손순자 드립니다.
<<편지가족 우체통 11집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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