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순자시인의 수필

어느 가을날 찾아온 행복한 조우(遭遇)

白松/손순자 시인 2007. 11. 10. 11:29
어느 가을날 찾아온 행복한 遭遇


멜로 영화를 싫어하는 여자도 있을까?
여자라면 누구나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고 정감 넘치게 표현하는 아름답고 에로틱한 영화를
좋아할 것이다. “나도 한 때는 한 달에 한 두 번은 영화 보러 다녔어요” 라며 20 여년전
영화관의 마지막 프로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군밤을 까먹으며 시린 손을 녹이던
겨울밤의 소중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젠 머 언 추억 거리가 되어버린 요즘,
서울 시내에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개봉관으로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오래전에 히트 친 영화를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동네 비디오 점에서 빌려다 보는 것이
고작이 되어버린 요즘, 그 날 난 감기 기운이 있어 집 근처 약국을 찾았다가 바로
옆 가게인 영화마을 로 자연스레 발길이 옮겨졌다.
그날따라 가끔씩 내리는 가을비 탓이었을까? 달콤한 영화라도 한편 보고 싶었던 것은...
만화와 월간지 대여도 겸하고 있는 조그만 가게 안에 손님 이라곤 없었다.
뭘 빌려다 봐야할까? 10 분 이상을 서성이던 나에게 지난겨울 일간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여자 주인공의 우수에 찬 아름다웠던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난 순전히 그 영화의 여자 주인공, 아시아의 최고 스타라는 ‘장만옥’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비디오 한편을 빌리게 되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이라는 뜻의
< 花樣年華 (화양연화) > 다.
1962년 홍콩, 상하이 사람들로 붐비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그녀 리첸 (장만옥)과 신문사에 근무하는 남자 주인공 차우 (양조위)는
두 사람 모두 결혼 했지만 그들의 남편과 아내는 해외 출장 등을 이유로 자주 집을 비웠고 그들은 거리에서 또는 아파트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
우연히 그들의 배우자가 자신들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것과 똑 같은 핸드백,
남편의 것과 똑같은 넥타이 들을...)조심스레 확인 하게 되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끌리기
시작한다. 가끔은 결혼한 것을 후회 한다는 ‘리첸’ 과 그들의 잘못도 아닌데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은 ‘차우’ 는 뭔가 다른 일에 몰두 하고자 무협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그녀도 가끔 그의 일을 도와주는 사이에 두 사람은 특별한 감정에 휩싸여 행복과 갈등의 시간을 보내게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소위 ‘불륜’ 이라는 ‘편견’ 에 덫처럼 걸려 있었으므로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의 헤어짐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그를 잊기 위해 이웃들과 지내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결국 그녀를 위해 싱가폴 로 떠나려는 ‘차우’ 의 부탁으로 두 사람은 이별 연습을 하게된다.
“다시는 전화 하지 마세요. 희망도 없는데...”
그녀는 결국 그의 가슴에 안겨 울어버리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애조 띤 감미로운 선율 (I'm in the mood for love)
이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이 영화의 감독 ‘왕가위’ 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잔잔하고 느긋하게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스신
이나 여배우의 미모만을 내 세운 어설픈 베드신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표현해 낸 놀라운 영화.
인스턴트 식 사랑이 너무나도 흔해져 버린 요즘 젊은 세대에게도 과연 공감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마저 생기는 영화. 사랑이란. 어떠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그들 나름대로 정의 하고 있을 테니까.
‘차우’ 그는 지나간 날 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비밀 하나를 캄보디아의 어느 낡은 사원의 구멍에 대고
그는 오래도록 속삭인다. 다만 그녀를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한 채.
오늘 날처럼 음란물이 아무 부끄러움이나 법적인 제제 없이 넘쳐나고 타락 일변도로 치닫는
성문화의 현실 때문 일까. 이 한편의 영화가 한층 돋보이는 것은.
이 영화는 살면서 안달하고 조바심 내던 내 가슴 속으로 슬며시 들어와 요동치던 마음자락을 지그시 눌러 주었다.
사랑! 그건 각자가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 것 서로가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보내도 편안하게 느껴지고,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 주고도 어떤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될 그런 사랑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자주 빛이라 불리 울 그런 사랑의 순간은...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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