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70 년 동두천.
혼자 노는 블로그질이 이젠 목적과 사용처, 바람같이 왔다 가는 인연들이
근대화의 역군들이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달래며 숨 쉬고 사는것 조차 코쟁이 미군이 찍어다가 사십년이 가까이된 빛바랜 사진이 문득 가슴을 친다.
그 코쟁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몇컷의 필름이 취미로.. 혹은 재미로 올렸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전부 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으나 그때 그 사람들 그 시간들이 잊혀 지지 않고 지금 살아 있다고.. 작은 조명이라도 밝혀 줄가 부다.
그때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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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살아야 하겠기에 "서울의 마천루" 라고 표현한 이곳은 여전히 평범하다 . 지금쯤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을 이곳 70년대 어느날의 단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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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그곳은 갈라진 나라로의 공식 주둔군 이었던 그나라 사람들의 놀이터였던 곳이다. 영어로 된 간판과 "대구 이발관" 그리고 요즈음은 없어지고 있는 전신주가 눈에 띄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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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집의 마루에 걸쳐져 있는 남자 고무신 그리고 그옆에 평범하게 있는 여자 고무신. 대비 되는 두 고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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짊어 지고 가는 무게 만큼이나 삶의 무게도 무거웠을 그때 그 아버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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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나 지금이나 세간을 지키기 위해선 필사적 이었다. 깨서 붙여 놓은 살벌한 유리 조각들 어렸을적 본적이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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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퍽
거리는 비포장 도로에 초가집 그뒤에 있는 교회.. 막 크기 시작한 한국 교회의 그것을 보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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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하늘은 가을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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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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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누나 뻘쯤 되었을 그때의 아이들 물고 있는건 막대엿이고 무언가 하며 놀고 있다 아직 뒤에 있는 감자는 그대로다.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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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타난 장난감 리어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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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걸로 봐서는 형재인 듯 싶다. 이것 저것 파는 구멍가게의 아이들.. 앞에 배추며 뒤에 있는 새우젖 두부도 보이고 누군가 에게는 자린고비의 그것으로 걸어 놓았을 굴비 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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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실인줄 알았는데 촬영자의 타이틀은 "라면"이었다. 쌀이 귀했을 그때에는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주식 이었을 그때다. 하도 자주 먹어서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 중에 하나다. 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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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치마가 월남치마 라는 것인가? 자주 듣긴 했지만 패션이고 뭐고 없던 그저 걸치기만 했던 그런 차림새 뭔가 공동 관심사나 볼거리가 생긴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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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뚫리면 때워서 썻을 양은 냄비가 등장했다. 노래자랑이나 마을의 상품으로 주로 "부상품"의 최고봉 이었던 것들.. 그릇 가게의 시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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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을까 마을에는 주로 공동 우물이 대세였다. 저걸로 물일 길어 세수를 해본지가 수십년이 되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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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범하고 쓰잘대기 없는 사진 몇컷의 사진을 보며 따뜻함을 느끼는건 왜 일까.? . |
사진 삽질현장 : IMCOM KOREAN History
Let It Be-Kazuhito Yamash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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