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주는 생각

[스크랩] 1969-70년 동두천

白松/손순자 시인 2009. 5. 29. 21:45

 

  1969-70 년 동두천.

 

 

 혼자 노는 블로그질이 이젠 목적과 사용처, 바람같이 왔다 가는 인연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나는 무었 때문에 이짓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 정리 정돈이 되어 
 나름 몰인정 하게 그르칠수 없는 濕(습)이 되어 버렸다.


 몇일전 일터에서 일에 사용할 몇 컷의 사진을 얻고져 해외 싸이트를 훓어내려 가다   
 구석진 창고에 쳐박혀 있을 좀 먹은 옛날 책 냄새 같은 몇컷의 사진들을 발견 한다.
 이거 처음 보는 사진들인데..     
 타이틀이 "Korea 1970  Dongduchun"  동두천의 70년도 사진..


 그때..

 근대화의 역군들이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달래며 숨 쉬고 사는것 조차
 녹녹치 않았던 하루 하루를 운명으로 받아드리며 살아야만 했던 그때 그사람들.

 코쟁이 미군이 찍어다가 사십년이 가까이된 빛바랜 사진이 문득 가슴을 친다.


 나는 옛날 사진들을 좋아한다.
 시간이 멈춘듯 잡을수 있어서 좋고.. 
 그때 같은 하늘아래 같은시간에 숨쉬고 있었을 많은 인연들이 봄꽃같이 떠올라 또한 좋다.

 그 코쟁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몇컷의 필름이 취미로.. 혹은 재미로 올렸을 
 그 순간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들의 필사적 일상 이었고 살아야만 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전부 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으나 그때 그 사람들 그 시간들이 잊혀 지지 않고

 지금 살아 있다고..  작은 조명이라도 밝혀 줄가 부다.

 

                                                                                            그때를 아십니까...?      
  

 

 

 

그래도 살아야 하겠기에 "서울의 마천루" 라고 표현한 이곳은 여전히 평범하다 .  지금쯤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을 이곳 70년대 어느날의 단편이다.

동두천 그곳은 갈라진 나라로의 공식 주둔군 이었던 그나라 사람들의 놀이터였던 곳이다. 영어로 된 간판과 "대구 이발관" 그리고 요즈음은 없어지고 있는 전신주가 눈에 띄인다.

한옥집의 마루에 걸쳐져 있는 남자 고무신  그리고 그옆에 평범하게 있는 여자 고무신. 대비 되는 두 고무신.
아마도 남편과 아내 혹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신발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비약 일까..^^

짊어 지고 가는 무게 만큼이나 삶의 무게도 무거웠을 그때 그 아버지들..

그때나 지금이나 세간을 지키기 위해선 필사적 이었다. 깨서 붙여 놓은 살벌한 유리 조각들 어렸을적 본적이 있는 것 같다.

질퍽

 

거리는 비포장 도로에 초가집 그뒤에 있는 교회.. 막 크기 시작한 한국 교회의 그것을 보는 듯 하다.

무심한 하늘은 가을이고..
손질할 감자는 많다. 일을 시작할 참 인지  수확의 숫자에 근심인지 어울리지 않게 고즈넉 하다.

하숙집 같다.
삼각 빤쭈..  요즘의 보디가드 속옷쯤 되었을 그 속옷..나그네 같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 셋방은 수많은 주인에게 어떤 안식처 였을까..?

큰누나 뻘쯤 되었을 그때의 아이들  물고 있는건 막대엿이고 무언가 하며 놀고 있다 아직 뒤에 있는 감자는 그대로다.  ㅎㅎ

드디어 나타난 장난감 리어카. !
저 공기 부양성 비닐 장난감 아마 삑삑 소리까지 난 것 같은데 아저씨는 입에 물고 있는 새모양 삑삑이로 호객 행위까지 했으리라

닮은 걸로 봐서는 형재인 듯 싶다.   이것 저것 파는 구멍가게의 아이들..  앞에 배추며 뒤에 있는 새우젖  두부도 보이고 누군가 에게는 자린고비의 그것으로 걸어 놓았을 굴비 까지..

무슨 실인줄 알았는데  촬영자의 타이틀은 "라면"이었다. 쌀이 귀했을 그때에는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주식 이었을 그때다.  하도 자주 먹어서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 중에 하나다.  ㅋ

저 치마가 월남치마 라는 것인가?  자주 듣긴 했지만 패션이고 뭐고 없던  그저 걸치기만 했던 그런 차림새  뭔가 공동 관심사나 볼거리가 생긴 것 같다..  

구멍 뚫리면 때워서 썻을 양은 냄비가 등장했다.   노래자랑이나 마을의 상품으로 주로 "부상품"의 최고봉 이었던 것들..  그릇 가게의 시초다.

수도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을까 마을에는 주로 공동 우물이 대세였다.  저걸로 물일 길어 세수를 해본지가 수십년이 되었구나.

참 평범하고 쓰잘대기 없는 사진 몇컷의 사진을 보며 따뜻함을 느끼는건 왜 일까.?

.

사진 삽질현장  :  IMCOM   KOREAN History

 

 

  Let It Be-Kazuhito Yamashita 

 

출처 : 나에게 힘이되는..
글쓴이 : 갓잡은 생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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