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순자시인의 수필

전곡역의 추억

白松/손순자 시인 2007. 11. 9. 16:16
요즘도 어쩌다 ‘전곡’ 버스 터미널 앞을 지나칠 때면 가슴깊이 싸한
아픔과 함께 그리움이 밀려오곤 하는 곳.
낯익은 골목, 숨이 헉헉 차던 언덕배기 지금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그리운 얼굴들.
만 6년, 두 아이를 모두 그곳에 살면서 낳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길지 않은 생애 중 가장 힘들었었고,
가장 행복했었고, 가장 어려웠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서울에서 소위 잘 나간다던 월급 장이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
하면서부터 철부지 새댁의 고달픔은 시작 되었다.
그때만 해도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힘들었던 전곡 시내.
가게에서 가까운 곳으로 급히 이사를 하려니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딸린 방 이었는데 겨울에는 부엌에 설거지 해 놓은 그릇이 얼 정도로 추웠다.
간신히 겨울을 넘기고 봄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새댁, 신랑한테 잘 얘기해서 우리 집으로 이사와, 우리 집에 장교가 사는 방이
곧 비게 될 거야.”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집 주인 아주머니 (김금순 여사) “영인 네가 우리 집에서 돈 많이
벌어 이사 나갔으면 좋겠다.” 고 하시던 아주머니 말씀대로 동두천의 18평 빌라로
입주 할 때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 시작은 보증금 얼마에 월세를 내고 살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돈이 벌려서
전세로 옮겨도 될 듯싶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세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럼 우리 집에서 전세로 살아요.” 한 동안 참 행복 했다.
사업도 번창하고 기다리던 첫 딸 아이도 태어났다.
딸 아이 의 돌잔치를 동네가 떠나가라고 성대하게 치렀다.
지금 같으면 뷔페식당 에서 편히 했었겠지만 그때는 음식을 모두 집에서
준비했다.
그때 이틀 동안 오셔서 음식 장만 해 주신 화장품 아줌마 (피어리스)는 지금도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시 무언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사업은 번창 했지만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은 일로 그는 갈등했고 전곡에서의 일은 정리하고 다시
서울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서울로 이사할 형편은 아니었다.
5~6 명의 직원들 월급 주기에 급급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돌 반지며, 결혼 예물로
받았던 금붙이 등이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거금을 주고 산 패물 보다
더 아끼던 카메라마저 전당포에 맡기고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다시 월세로 이사 나가야 할 형편에도 아주머니는 다시 월세로 돌려 주셨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월세 보증금 까지 미리 찾아 쓰고 월세를 더 내는 상황 이 되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집 에올 차비가 없어서 오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공장에서는 정부미 20Kg 으로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으나 쌀값 외상값을 갚지 못해서 따른 쌀집에서
조금씩 사서 먹는 일이 빈번했다.
그때 ‘정’ 과장은 고등어 한 마리로 7인분이나 되는 찌게를 용케도 끓여냈다.
그런 중에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여유롭게 정기적으로 ‘의정부 성모병원’ 으로 검사를 받으러
다니던 때와는 달리 병원에 가볼 여유조차 없었다.
7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연천에 있는 ‘모자보건센터’ 를 찾았다.
생각했었던 것 보다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내가 은행 나갈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기가 가서 찾아”
라며 아무런 의심 없이 남편의 월급 통장과 도장을 건네주면서
미안해하던 효정이 엄마, 아진이 엄마 그 들은 정말 소중한 이웃 이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처럼 모여 정을 나누던 그들은
평범한 월급생활로 그 당시 나에게는 너무나도 부러움의 대상 이었다.
겨울이었다. 둘째를 낳을 무렵 효정이 엄마가 불렀다.
“만두 국 끓였으니까 빨리 와 애기 잘 낳으려면 잘 먹어야지”
그때의 만둣국 맛은 그 후 어디에서도 다시 맛 볼 수 없었다.
둘째 아이는 아들을 낳아서 너무 좋다며 나보다 더 좋아하며 쇠고기 잔뜩
사다주던 혜연이 엄마, 일주일 동안 10분 거리의 추운 길을 오가며
밥이랑 미역국 끓여 주시고 빨래까지 해 주시던 늘 언니 같던 꼭지 엄마,
2년 전 전곡에서 우연히 만나 집에 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해서 들렀더니
캔 맥주 한 박스를 번쩍 들어 차에 실어주던 성훈엄마,
잊혀질 만 하면 한번씩 전화해서 “가끔씩 전화해서 목소리 좀 들려주면 안돼?
목소리 잊어버리겠다. 책 좀 보내줘 우리 소정이가 자기 열성 팬이잖아”
하며 전화만 연결 되었다 싶으면 30분씩 투정 부리는 소정엄마.

하지만 ‘전곡’ 에서의 6년, 나의 삶 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그때, 그 시간에
만났던 사람들, 추억들은 내 삶에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으로
오래오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고 싶다.


2006년4월 월간 '천원의 행복' 특집 '제 친구와 인사 하실래요' 게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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