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松/손순자 시인 2008. 5. 29. 11:53

서로의 어린시절 마저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결혼을 한 후에 나의 하루 생활은 남편의 출퇴근 시간에 맞추게 되었고,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이외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사치요,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사진을 찍고, 김밥을 싸고. 병원에 가고, 누구 누구의 엄마로 살아오던 날들.
그렇게 나를 증발시킨 세월은 어느덧 나이 40을 훌쩍 넘긴 중년의 문턱에 다다르게 했다. 내 키보다 훨씬 커버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한편으론 대견스럽고 또 다른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기만 하던 시간도 있었다.
대개 이 나이쯤 되면 집안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려 한다고들 말한다. 남편들은 ‘마누라가 토끼에서 호랑이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향락주의의 온상이 ‘중년여성’인 듯 몰아세우고 모두가 한심한 여성들만이 모여 사는 나라가 마치 우리나라인 것처럼 떠들어대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남은 내 인생의 꿈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라고 반문할 때쯤에 매년 시청에서 주최하는 ‘주부 백일장’에 나가 입상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홀로 책이나 원고지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알 수 없는 무력감과 나태 속에서 허덕이던 나에게 한 달에 한번 회원들끼리 돌려보는 회보에 글을 써서 낸다는 일은 신선한 청량제 구실을 해주었다.
제 작년 겨울, 나의 詩가 몇 편 실린 글벗 '소요문학. 회원들의 작품집 한 권을 남편의 사무실에 슬며시 놓고 오던 날도 전혀 오늘을 예감하지 못했었다. 2000년 11월, 격월로 발행되는 <월간 스크린 인쇄 기술 정보>지에 총 9쪽의 지면을 차지한 인도 기행문이 실리고 내 사진 밑에 ‘엘로라 석굴을 배경으로 한 필자.’라고 인쇄된 글을 보았을 때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너무나 오랜 세월 잊고 살아왔던 내 이름이, 늘 이름자가 너무 흔하다고, 너무 촌스럽다고 감추려 들던 그 이름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살림도 잘하고, 애들도 반듯하게 잘 키우고, 남편 내조 잘하고, 내 이름까지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며칠 전 또다시 중국 기행문(A4 11매)을 보내 놓고 난 또 한번 나대로의 기대감과 행복을 나만의 내밀한 목적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마다의 각기 능력과, 각기 다른 개성과 다른 가치관에 따라 자기를 성취시키는 그런 것이 아닐까? “협회보에 실린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끔씩 듣는 이 한마디에 난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착각을 한다.

2000년 11월 일기 中에서.